「글쎄다.」
「할아버지가 나 놀리려고 거짓말 했지, 그치? 」
  소녀는 여느 때와 다르게 통통하게 부어오른 볼로 깐지게 말했다.
「이 할아버지도 그걸 모르겠구나. 아마 기차가 오다가 빵구가 낳는가보다.」
「기차 쇠바퀴가 어떻게 빵구가 나. 맨 날 봐도 기차가 안 오던데, 할아버지 거짓말쟁이야. 」
  소녀는 동그란 눈동자를 똘망똘망 굴리며 투정을 부렸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오지 않겠느냐.」
  햇빛을 비껴 앉은 노인의 얼굴엔 수심이 짙게 서렸다.
「칫, 할아버진 바보야. 기차는 안 온단 말이야. 난 한 번도 기차가 오는 걸 못 봤단 말이야. 엄마도 그랬어, 선생님도 기차는 오지 않는다고 그랬단 말이야. 난 알아. 할아버지가 혼자 맨날 심심하니까 나를 놀리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
  소녀는 선생님과 엄마가 들려준 말이 사실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기차는 온단다. 저렇게 철길이 있는데 기차가 왜 안 오겠느냐. 할아버지는 읍내 나와서 장을 다보고 나면 언제나 이 정거장에서 기차를 타고 집에 갔단다.」
「아니야,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할아버지뿐이야. 난 알아.」
  오늘따라 소녀는 빤한 소견으로 나왔다.
「할아버지는 고향에 돌아가야 한단다. 딱 한 정거장이야. 할아버지도 집엔 너만한 딸이 하나 있단다.」
  노인은 시간이 멈춘 먼 기억 속을 말했다. 주름살이 굵게 이랑처럼 패인 노인의 얼굴엔 무수한 회한들이 떠올랐다.
  착취와 수탈이 극심하던 왜정의 패망, 태극기를 흔들며 해방을 맞이하던 기쁨도 잠깐, 삼천리강토를 피로 붉게 물들이던 전쟁 말미 거제도반공포로수용소를 나와 허덕지덕 달려온 기차역, 고향으로 가는 기차는 오지 않았다. 늙은 어머니, 아내와 지식에 대한 그리움. 낯선 타관에서의 늙어가는 서러움. 기나긴 세월 동안의 기다림.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였다. 벌판으로 뻗어 있는 철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디쯤인가 기차가 오고 있었고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가 있었다. 그것은 졸지에 단절되어버린 삶의 연장이었다. 이제 시들어가는 힘과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생존을 한 자락 꿈으로 채워주는 마지막 절정의 순간들이기도 하였다. 허물어져 늙은 몸으로 정신이 가장 흐렸을 순간에도 그는 고향의 모든 영상들이 떠올랐고 어린 딸애의 모습이 선연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 남반부 인민해방. 제국주의 군대의  네이팜탄 폭격. 패전. 그리고 한(恨) 서린 이별, 삶의 평화와 안식이 없는 세상의 떠돌이......
「우리 순지 배고프지?」
  노인은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인은 언제나 한쪽 어깨 메고 나오는 걸망에서 보자기에 싼 것을 꺼내었다. 주먹밥이었다.
「오늘은 너를 주려고 이 할아버지가 고소한 깨소금 밥을 해왔느니라,」
  노인은 고소한 깨소금으로 둥그렇게 뭉친 주먹밥 한 덩이를 배가 고파 보이는 소녀에게 내밀었다.
「어서, 먹어보려므나. 깨소금에 뭉친 밥이라서 고소하고 아주 맛이 있을 게야,」
  인적이 드믄 벌판길에서 소녀를 만난 뒤부터 노인은 주먹밥 한 덩이씩을 더 맛깔스럽게 만들어 오고 있었다.
「먹어 보거라. 」
  노인은 소녀 앞으로 주먹밥덩이를 거듭 내밀면서 옛날 생각에 잠겼다. 어린 딸이이 작은 손에 들려주던 쑥 버무림 한 덩이, 그것은 말이 쑥떡이지 옥수수 가루를 조금 묻힌 둥 마는 둥 버무린 퍼런 쑥덩이였다. 그런 쑥 버무림 한 덩이도 얻어먹기 힘들던 시절의 어린 딸아이, 이 기차역 승강장 의자에서 어린 딸아이의 조그만 손에 퍼런 쑥 버무림 한 덩이를 쥐어주던 마지막 기억, 노인은 지금 그 어린 딸아이와 마지막 멈춰버린 시간의 회상에 잠겼다.
「밥 참 맛있어.」
  딸아이가 퍼런 쑥 버무림을 한 입씩 맛있게 베어 먹고 있었다.
「우리 순주 배가 아주 많이 고팠었구나. 목이 메거든 물도 좀 마셔가며 천천히 먹어라.」
  쑥 버무림을 야무지게 베어 먹은 딸아이를 바라보는 노인의 두 눈에 눈물이 넘쳐
흘렀다.
「할아버지, 내 이름도 잊어버렸어. 난 순주가 아니라 순지야, 순지.」
  옹골찬 소리에 노인은 화들짝 환상에서 깨어났다.
「허허 그렇구나. 그래, 네 이름이 순지라고 했지. 이 늙은 할아버지가 그새 네 이름을 깜박 잊어먹고 말았구나. 」
  노인은 민망스레 대꾸했다.
「이젠 잊어먹지 마, 할아버지. 또 잊어먹으면 난 할아버지와 동무 안 할 거니깐. 알았지?」
「아이구우, 이 할아버지가 순지 이름을 깜박 잊어버렸다가 혼이 나는구나.」
  노인은 순지가 남 같지 않았다. 비록 칠순의 나이로 고비늙어버린 늙은이 일지라도   순지는 먼 기억속의 딸아이 순주였다.
「할아버지, 이제 그만 가.」
  순지는 갑자기 할아버지의 손을 그러잡았다.
「할아버지 손은 영락없이 나무껍질을 만지는 거 같아.」
  순지는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할아버진 늙어서 그렇단다. 」
  노인은 아쉬운 미련을 두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우리 순지, 어디 가서 놀다 늦게 집에 오느냐고 엄마한테 혼날까봐서 그러는구나?」
「아냐.」
  순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엄마는 목소리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치거나 무서운 얼굴로 혼내는 일이 없었다. 혼을 내기보다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덥석 품에 끌어안고 울적도 있었다.
「엄마, 난 왜 아빠가 없어?」
  순지는 엄마에게 물었다.
「가게에 나오지 말랬잖아. 어서, 들어가!」
  엄마는 궁금한 대답대신 엉뚱한 소리로 버럭 화부터 냈다. 그때 엄마는 무섭게 화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 뒤 순지는 무섭게 화내는 엄마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두 번 다시 아빠 얘기를 꺼내지 아니했다. 엄마는 밤마다 가게에 술을 먹으러 온 손님들과 술상을 두드리는 장단을 맞추고 목이 쉬도록 컥컥거리며 힘든 노래를 불렀다. 순지는 죽도록 술장사에 시달리는 엄마가 불쌍해서 문틈으로 가게의 엄마를 엿보곤 했다. 손님들이 밤이 깊도록 돌아가지 않던 어느 날이었다.
「앞이 창창한 구만린데, 그동안 누가 손이라도 슬쩍 한번 내밀어 볼라치면 덴겁하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도리머리를 썰썰 흔들더니 이젠 아예 시집을 안 갈 작정하고 툭툭 털어 붙이며 손사래를 치고 마는 게야?」
엄마 어깨에 팔을 두른 손님이 물었다.
「나한테 혹이 붙어 있는 걸 보고서도 그런 소릴 하세요? 」
시큰둥하게 고개를 쳐든 엄마는 손님의 코가 납작하게 쏘아붙였다.
「혹이라니? 미선이는 딸애가 팔자에 달라붙은 혹일지 몰라도 나한텐 둘도 없이 귀여운 딸자식이 되지 않겠나. 장교랍시고 그동안 단물 쪽쪽 다 빨아먹고 후방 전속명령이 떨어지니까 뒤도 안 돌아다보고 달아난 놈들도 애인이고 신랑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만하고 술이나 드세요. 이 년 팔자야 벌써 달달 볶아먹고 푹 고아먹었으니 술맛 떨어지는 소리 말고 다른 여자를 찾아봐요.」
술이 잔뜩 취해서 장사를 끝낸 엄마는 냄새를 풀풀 피우는 딸꾹질로 잠든 딸의 볼에 몇 번씩이나 입을 맞추며 눈물을 줄줄 흘렸고, 마구 쏟아지는 장맛비가 마당에 갈피를 모르고 이리저리 흘러내리듯 엄마의 눈물이 잠든 양 볼에 줄줄 흘러내리고 했다.
엄마는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손님들과 산드러진 웃음소리로 어울려 목청이 꺽꺽 쉬도록 노래를 불렀고, 군인아저씨들은 엄마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고 뒷방으로 헤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 일이 생길 때면 엄마는 어서 자지 않고 뭘 하느냐면서 다그쳐 나무랐고, 공부하라는 성화로 방에서 꼼짝도 못하게 했다.
손님들은 밤새껏 돌아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손님들이 없는 날은 군부대에 며칠씩 외출외박이 없이 비상이 걸린 때였다. 며칠쯤 쥐죽은 듯 고요한 날들을 빼놓고 가게는 매일같이 쿵작거리고 술상을 두드리며 손뼉을 치는 노랫소리로 소란스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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