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일이 더 지난 봄날은 아주 화창했다. 노인은 오늘도 변함없이 기차역 벌판길을 걸어갔다. 햇볕이 제법 뜨겁게 깔리는 벌판엔 실아지랑이가 조금씩 가물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철책선 아득한 이북 땅 하늘엔 흰 구름이 엷게 떠 있었다. 노인은 지금 흰 구름이 떠가는 하늘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고향이 얼마나 천리만리 머나먼 곳인지, 쓰라린 서글픔을 목구멍이 찢어지게 삼키며 붉게 피멍이 든 상처의 진한 아픔으로 새삼 깨닫고 있었다. 한세월 한이 맺힌 인생을 다 마치면서 북망산을 바라보는 노년에 고향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먼발치로나마 고향하늘을 먼눈으로 바라보고 있기라도 하면 한겨울 문풍지를 때리는 삭풍에 식어 내린 가슴에 따뜻한 훈기가 돌아 고단한 삶의 여정에 지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가 있었다.
「내 세월이 다 달아났을 터인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노인은 짧게 드리워지는 해 그림자를 지고 벌판길을 다 걸어온 기차역을 들어서면서 오늘은 공휴일이라는 걸 생각했다. 관광객들이 몇 떼거리 몰려올 터였다. 것이라는 들 삼거리의 어린 것이 일찍 나올 터였다.
역시나 대합실은 손님 한 사람 없이 적막했다. 노인은 요즘 따라 먼 벌판길을 헤쳐와 기차를 기다리는 날도 얼마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부쩍 자주 찾아들고 했다. 좀체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늙어버린 날들이 서럽기도 했지만 부질없이 망령된 생각은 들지 아니했다. 다만 죽는 것이 억울하고 서러운 게 아니라 기차를 더 기다려 볼 수 없는 것이 정작 서러운 것이었다.
  노인은 대합실을 지나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사람 하나없이 텅 빈 승강장엔 눈부신 햇빛만 하얗게 깔리고 있다. 노인은 언제나처럼 벌판을 가르고 나간 철길로 눈길을 주었다. 반짝이는 햇살이 흐린 노인의 눈길을 가로막았다. 벌판의 대지를 구르는 기차 쇠바퀴의 진동도, 기적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기차도 오지 않는다. 노인의 눈은 벌써 피로하고 야윈 몸은 힘겹게 노그라지고 있었다. 흐느적흐느적 승강장 벤치로 걸어가던 노인은 돌연 이상한 예감에 커다란 눈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 <할아버지는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 -

  문구가 적힌 종잇장딱지를 앞가슴에 걸어 펼치고 있는 순지는 고개가 옆으로 꺾인 모습으로 잠이 들어 있었다. 노인은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동에 가슴이 뭉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쯔쯔, 녀석두...,」
  애잔한 마음으로 벤치로 다가간 노인은 아프게 고개를 꺾고 잠든 순지를 두 팔에 가만히 받아 안았다.
「할아버지이...,」
  잠에서 깨어난 순지는 부스스 눈을 떴다.
「오냐. 오늘은 순지가 일찍도 나와 있었구나,」
  노인은 다른 애들과 다르게 영리하게 눈치가 재빠른 순지의 등을 토닥토닥 덮두들겨 주었다.
「봄볕에 얼굴이 그을리면 늘 보던 님도 몰라본다 하지 않더냐.」
  노인은 봄볕에 붉게 익어버린 순지의 얼굴을 다시금 쳐다봤다.
「할아버지, 기차는 정말 안 올라나 봐,」
  순지는 볼멘소리로 울먹거렸다.
「앞가슴에 걸린 종잇장딱지는 네가 글을 써서 매단 게냐?」
  노인은 순지가 커다란 글씨로 써서 목에 걸고 있는 앞가슴의 종잇장을 다시금 바라보며 어린 것의 기특한 소견에 놀랐다.
「맨 날 오지도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 할아버지가 불쌍해서 텔레비전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보고 똑같이 배웠단 말이야. 할아버진 고향에 가야 하잖아.」
  순지는 눈물이 비치는 두 눈을 줄곧 껌벅거렸다.
「이 할아버진 기차를 기다리는 것이 아주 익숙해졌단다. 기차가 안 온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일이 없구.」
  노인은 고개를 들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무래도 기차는 영영 오지 안 오려나보았다. 그런 생각이 들면 노인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새롭게 잘 단장된 기차역과 벌판의 철길에 기차가 오지 않고 예전처럼 뻘겋게 녹이 슬어 우거지는 갈대밭에 파묻혀 버린다면 하루같이 기차를 기다려온 일생이 허망하게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정말 기차를 기다리는 것은 할아버지뿐이야. 엄마도 그랬어. 할아버지가 기차도 오지 않는 기차역에 나가 기차를 기다린다구.」
  순지는 동그란 눈을 뜨고 부아가 났을 때처럼 퉁퉁거렸다. 노인은 눈물이 젖어 올라오는 먼눈을 팔았다. 아지랑이가 가물가물한 갈대밭 벌판에 종달새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북녘 땅 쪽엔 멧비둘기인지 산 까치인지 몇 마리가 긴 산자락 능선 너머로 자유로이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불현 듯 노인은 제 둥지를 찾아 날아갈 수 있는 새들의 평화로운 자유가 마냥 부러웠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기차역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그 사람들은 아마도 이 기차역이 퍽이나 신기한 모냥이더구나.」
  순지와 몇 마디 주고받던 노인은 벤치에서 일어나 승강장 끝머리 파래진 풀밭으로 걸어갔다.
「어딜 가, 할아버지?」
「이 할아버지가 순지에게 예쁜 꽃반지를 만들어주려고 그러지.」
  노인은 풀밭을 더듬으며 민들레꽃을 찾다 잔디밭 쪽에 피어난 오랑캐꽃을 보고 다가갔다. 보라색 오랑케꽃에서 그윽한 내음이 풍겼다. 노인은 허리를 굽혀 보라색 어랑케꽃 한 떨기를 땄다.
「예쁜 꽃반지를 만들어 줄께.」
  노인은 오랑캐꽃의 줄기를 동그랗게 만들어 꽃받침 속으로 가만히 끼워 넣어 예쁜 꽃반지를 만들었다.
「이 꽃은 병아리처럼 귀엽게 생겨서 병아리 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봄나물로 살짝 데쳐서 무쳐먹기도 하고 꽃잎을 모아 데친 다음 잘게 썰어서 밥에다 섞어서 꽃밥을 만들어 먹기도 하는구나. 몸의 열을 내리고 독을 풀며, 가래를 삭이고 잠이 안 오는 데도 효과가 있다는구나.」
  오랑케꽃 반지를 예쁘게 만든 노인은 순지의 보동보동한 가운데 손가락에 가만가만 끼워주었다.
「이 꽃반지 예쁘다, 할아버지. 」
  순지는 손을 들고 생글생글 웃음꽃을 피우며 꽃반지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꽃반지가 그렇게도 좋으냐?」
「응, 할아버지. 학교 가서 우리 반 애들한테 자랑해야지. 엄마한테도 보여주구.」
  순지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 할아버진 오랑케꽃 반지보다 순지 네 얼굴에 핀 웃음꽃이 훨씬 예쁘구나.」
「아니야, 할아버지 이 꽃반지가 더 예뻐.」
  즐거운 실랑이를 놓는 사이에 산발 능선을 가로지른 철책선을 넘어와 갈대밭 벌판에 깔리던 북한의 대남방송이 주춤하게 숨을 죽이고 잠잠했다. 바로 그때다. 마을 삼거리 쪽에서 적막한 벌판의 고요를 가르며 요란한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순지는 몸을 움찔하고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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