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니면 모두 전장의 적들로 보이는 세상이지. 눈빛만 거슬려도 주먹이 번개처럼 날아들고 시퍼런 칼날이 언제 숨통으로 날아들지 모르는 세상이야.”
이젠 생존법을 다시 배워야 목숨을 부지하고 살 수 있겠어.”
제 어린 딸년을 상습적으로 짓밟는 애비새끼도 있다잖아.”
거머멀쑥한 사내는 망조가 든 사회를 타박했다.
애비가 아니라 짐승이지.”
미친 짐승도 제 새낄 벌거벗겨 조지진 않아. 짐승만도 못한 놈에 짐승 같은 놈, 짐승보다 조금 나은 놈들의 세상일지.”
감방에서 지독하게 담배에 굶주렸던 사내들의 버름한 콧구멍에선 마치 청솔가지가 타는 굴뚝처럼 뽀얀 담배연기가 폴폴 내뿜긴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배가 좀 고프게 살긴 했어도 사람이 사는 맛이 있었지.”
훈훈한 정감들이 참으로 많았어. 요즘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죽어 나가는지도 모른다잖아.”
술잔을 받아 비우던 사내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님, 여기 들어와 곡차나 한 잔 하시우.”
말씀들을 나누시는데 죄송하지만 혹 미륵봉이 어디 있는지 아시는지요?”
유정은 술잔을 사양하고 물었다.
미륵봉요? 이봐요, 아줌마. 미륵봉이 어디 있는 거요?”
낡은 점퍼를 입고 있는 사내는 오히려 가게주인 쪽으로 물었다. 가게주인은 출소자가 묻는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런 대꾸가 없다. 유정은 굵은 빗발이 차츰 더 거세지면서 물안개 속에 잠긴 도로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승려에게 계율은 생명과도 같았다. 씻지 못할 죄로 계율을 파하여 그 생명을 잃었다면 비구가 아니었다. 비구일 수가 없다. 바른 법을 받으면 잊지 말고, 중생에게 성내지 않고, 다시는 부처님의 계를 범치 않으리라, 유정은 마음다짐을 했다여우같던 마누라는 제 생살을 찢으며 낳은 새끼들을 추운 냉방에 새파랗게 얼려놓고 뛰쳐나가 뒈졌는지 살았는지 돌아올 줄을 모르구 있었지.”
출감자들의 취기어린 대화가 계속되었다.
형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멀건 콩나물국에 겨우 밥 한 덩이를 말아먹이던 새끼들은 보나마나 어디로 뿔뿔이 흩어져 거지꼴이 되었겠지.”
이 개똥바다에 이놈의 희망은 무엇이냐?”
빗물이 흥건하게 질퍽거리는 아스팔트 위로 직행버스 한 대가 쾌속으로 달려간다. 방에서 나온 가게주인은 미닫이 출입문을 조금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버스가 와요.”
술자리를 벌이고 있던 출감자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빗속을 달려온 시내버스가 가게 앞 정류장으로 멈춰 섰다.
스님은 버스를 안 타려우?”
출감자 하나가 붉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돌아보며 물었다.
먼저들 가시지요.”
유정은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서너 명의 출감자들이 굵은 빗속을 달려 나가 올라탄 버스는 곧바로 출발했다. 버스정류장엔 유정스님 혼자 덩그렇게 남았다.

[<]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